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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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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상륙작전

1950. 9. 15 유엔군 제7합동기동부대에 의해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총 7만여명의병력과 261척(미국 225, 영국 12, 캐나다 3, 호주 2, 뉴질랜드 2, 프랑스 1, 네덜란드 1, 한국 15)의 함정이 참가한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적의 후방 병참선을 차단, 수세에서 공세로 일시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국군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과 15척의 함정 해병대 3개대대 및 육군 제 17연대가 참가하였다

* 도솔산지구작전

1951.6.4~19도솔산지구작전 적의 춘기공세를 분쇄하고 북상한 우리 해병대는 1951년 6월 3일 화천저수지일대까지 진출하였는데, 여기서 맡은 전투지역은 38선 이북 양구와 인제 간에 있는 태백산맥 가운데서 가장 험악한 지역 이었다. 이 지역은 도솔산지역으로 일찍이 유엔군이나 우리 국군이 한번도 진격하지 못한 곳이었고 적이 또한 난공불락임을 호언하던 천연 요세 이기도 하였다.

적은 이 곳에 틀어박혀 발악을 하였는데, 이 지역은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으므로 만약 이 지역을 확보하게 된다면 우리 해병대와 좌우에 있는 우군의 계속진출이 매우 용이 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적에게 포위 당할 우려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 해병대가 담당한 도솔산지구일대는 양양에서 철원을 3각의 저변으로 하고 원산을 정점으로 하는 중동부의 이른바 철의 3각지대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적은 이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아군의 공격을 저지 하려 하였는데, 여기에 배치된 적은 인민군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제5군단 제12사단과 제32사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군의 공격목표인 23 및 24고지를 두고 2, 4, 9, 11 및 18고지를 연하여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주저항선에는 견고한 진지가 구축되고 막대한 수량의 지뢰가 매설되어 거듭된 공격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우리 해병대는 끝까지 감투정신을 발휘하여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고지들을 모두 점령하였다.

이 도솔산지구작전은 최초 미해병 제1사단의 제5연대가 담당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4일 이른 아침 우리 해병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미해병대에서 8목표전방 약2km지점의 고지를 점령하는데 무려 500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어 부대정비 및 재편성의 기회를 갖기 위해 우리 해병대 제1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인접 우군으로서는 좌측에 미해병 제7연대, 우측에 제1연대가 있었고, 미해병 제1공병대대의 제2중대 제3소대와 제11연대 제3대대(포병)가 우리 해병대를 직접 지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무를 교대할 우리 해병대에 미해병대 제1사단으로부터 6월 3일 24시에 다음 같은 요지의 명령이 하달 되었다.

1) 제1대대는 6월 4일 오전8시 이전에 680고지, 910고지 부근에서 목표1을 점령할 준비를하고  이어서 목표2를 점령할 준비를 갖추라.

2) 제2대대는 6월 4일 오전 8시 이전에 105.7고지 남쪽의 912고지 부근을 점령후  이어서 목표8과 목표7을 점령할 준비를 갖추라.

3) 제3대대는 연대예비대로서 800고지 부근을 점령하고, 증강된 1개 소대를 차출하여   고지3을 점령 후 연대우측을 엄호하라. 당시 우리 해병대 중간보급소는 광사동 부근에 있었고, 연대본부는 원동지곡, 그리고 의무대는 죽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6월 4일 새벽 총공격에 앞서 연대장 김대식대령은 [어떠한 난관이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자만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훈시를 내렸다.  

우리 해병대는 1951년 6월 4일 오전 8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고 일진일퇴하는 가운데 6월 12일에 이르러 Kansas Line 안의 16개 고지 전부를 점령하였다. Kansas Line 이남의 전략적인 요지를 상실한 적은 완전히 사기를 잃게 되어 나머지 17부터 24까지의 8개 고지는 비교적 용이하게 점령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해병대 정면에 포진되었던 적은 인민군 12 및 32사단이었으며 우리 해병대가 점령한14목표와 그앞에 있는 17목표 사이의 대암산봉 능선일대에 집결되어 있었다. Kansas Line내의 1목표에서 16목표까지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이어서 Badger Line의 17에서 24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제2단계 작전을 6월 13일부터 개시하게 되었다. 제1대대는 11고지를 근거지로 삼고, 제2대대는 9 및 10고지의 진지를 강화하면서, 제3대대는 13고지에서 도솔산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각각 정찰을 실시하는 가운데 제2대대가 6월 15일 오전 8시에 공격 을 개시하여 17, 18 및 19고지를 점령하게 되어 있었다. 이같은 작전계획은 이후 제3대대가 목표 20, 21 및 22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할 때, 측면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이같은 계획 밑에 제2대대는 17일 8시 31분에 임무를 완수하고 제3대대가 공격할때, 능률적으로 지원 하였다. 적은 고지 후면 암석에 잠복하여 저항해 왔기 때문에 육박전을 감행한 끝에 6월 17일 12시 30 분 20고지를 점령하고 다음 날에는 21고지, 그리고 19일에는 22고지를 차례로 탈환하여 드디어 도솔산을 완전히 점령 하였다.

이어서 제1대대는 11고지와 14고지로 이동하여  23 및 24고지를 점령할 준비를 갖추고, 19일 7시에 22고지부근까지 전진하여 8시부터 공격을개시하여 9시 30분에 23고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미해병대 제7연대는 우리 해병대의 좌측에서 24고지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고, 6월 20일 제3대대가 24고지를 인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솔산 일대의 산악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우리 해병대의 찬란한 공훈에 대하여 당시의 국회의장(신익희)은 감사문을 신현준 사령관에게 보내왔고, 또한 미국 대통령은 참모장 김성은 대령과 제1연대장 김대식 대령에게 미국 은성훈장을 수여하였다.

도솔산 24개고지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이 고지들을 위협하는 적 3개 대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대우산을 7월 8일부터 2일간 걸쳐 공격하여 다대한 전과를 올린 다음, 7월11일부터 17일까지 방어전에 임하였다. 이와같이 6월4일부터 7월17일까지 40여일동안 대규모의 산악전을 수행한 우리해병대는 전선을 미육군 제2사단 제38연대에 인계하고홍천지방으로 이동하여 차기작전을 수행할 준비에 임하였다.

김일성 고지전투북한 인민군 제3군단 예하의 정예부대인 제3연대가 924고지를 김일성고지로,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로 명명하면서까지 사수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을 때, 우리 해병대 (제1연대 연대장 대령 김대식)는 1951. 8. 31 첫 공격을 개시한 이래 적의 완강한 저항과 매설된 지뢰에 의해 사상자가 속출 하였으나 맹렬한 공격으로 혈전을 거듭하여, 1951. 9. 2 924고지를점령하고 이어서 1951. 9. 3 마침내 026고지를 점령하여 한국 해병대의 임전무퇴 정신을 국내외에 과시하게 되었다.

도솔산 고지전을 수행 후 홍천지방의 철정리에서 부대를 재편성한 제1연대는 8월 27일에 다시 새로운 임무를 띠고 출동하게 되었다. 우리 해병 제1연대가 출동한 지역은 중동부전선에서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인 펀치볼일대의 고지였다. 제 1연대는 8월 28일 평촌에 집결한 후 거기에서 Kansas Line의 방어를 위하여 전선으로 이동하여29일 Kansas Line에서 미해병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즉시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1951년 6월 10일 개성에서 열린 정전회담 이후 피아가 서로 소규모의 정찰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으나, 이번에 우리 해병대가 맡은 임무는 적의 주저항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우리 해병대가 공격할 목표는 도솔산을 출발점을 삼고 만대리 분지를 둘러싼 지단의 능선일대에 있는 주봉들인데, 이 일대를 우리가 확보하게 되면 금강산을 가까이 바라보면서북한땅 깊숙히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이 지점의 924고지와 1026고지를 점령하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중동부전선의 전세를 전반적으로 유리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큰 것이었다.

924고지와 1026고지에는 인민군의 최강부대인 제3군단 제1사단 제3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예하 제1대대(약 500명)가 924고지에, 제2대대(약500명)가 1026고지에 각각 포진하고 제3대대가 예비대로서 그 후방에 대기하고 있었다. 적은 소련제 중화기로 장비되어 있었으며, 각 대대는 82미 박격포 8문과 중기관총 6문을 장비하고 있어 화력면에서 우리 해병대보다 훨씬 우세한 상태였다. 또한 적은 휴전회담중의 소강 상태를 이용하여 방어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하였고, 진지전면에 막대한 수의 대인지뢰를 매설해 놓았다.그러면서 도솔산에서 패배한 치욕을 여기에서 만회한다고 호언하면서 924고지를 '김일성고지' 그리고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라고 명명하고 있었다.924고지를 공격할 부대는 제2대대였는데, 8월 31일 공격 대기지점인 월산령에 집결하여 공격을 감행하여 고지전방 100야드지점까지 이르렀으나, 날씨가 불순하여 관측착오로 말미암아 아군지원 사격포탄이 공격부대 주변에 낙하하고 또한 적의 지뢰에 의한 부상자가 속출함으로 부득이 공격을 중지하고 일단 철수하였다.

이날 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제3대대의 최전방중대인 제11중대를 시찰 격려하고 돌아가다 지뢰를 밟아 부상당하자 부연대장인 김동하 중령이 임무를 대행하게 되었다.9월 1일 제3대대는 재차 공격을 개시하고 전일의 실패를 거울삼아 육박전을 감행하여 제10중대가 적진 300야드까지 접근하게 되었으며, 제11중대는 924고지 100야드전방까지 성공적으로 진격하였다. 9월 2일 제1대대 제3중대와 제2대대 제 6중대가 9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하여 12시 20분에 924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날의 공격이 비교적 용이하였던 것은 제12중대의 박격포 연막탄에 의한 연막차장이 적절하게 이루어졌고, 날씨가 청명하여 아군의 항공지원과 야포지원이 효과적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이었다. 924고지를 점령하는 3일간의 혈전으로 제1대대와 제3대대가 다대한 피해를 입었으므로 1026고지에 대한 공격은 예비대로 있던 제2대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제2대대는 제3대대가 924고지를 점령하자 곧 이어 1026고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9월 3일 정오 이전에 1026고지를 전체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이렇게 하여 목표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924고지, 1026고지및 1056고지 등 일대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하였다.

이 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우리 해병대의 이름이 또다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혹한과 싸우면서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우리 해병대는 1952년 3월 17일 수도서울의 방어를 위하여 서부전선으로 이동하게 되었다.마산 서남방의 관문 지대를 형성하는 이른바 3전지구 가운데 마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진동지구에 위기가 고조된 시기는 낙동강 공방전이 바야흐로 가열되기 시작한 1950년 8월상순경 이었고, 이 지역으로 침공했던 적은 마산을 공략하기 위해 호남지구를 석권한 다음 진주와 사천 및 고성지구로 기동한 방호산 소장이 지휘하는 북괴군 6사단, 그리고 이 지역에 투입이된 아군 부대는 "킨" 소장이 지휘하는 미육군 제25사단과 긴급 배속된 미 제24사단의 1개 연대와 미해병 제5연대(1여단), 그리고 서부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된 한국해병대의 김성은 부대와 육군의 민기석부대 및 최천 경무관이 지휘하는 경찰부대 등이었다.한편 진동지구에 투입이 된 미 제25사단과 그 배속부대들은 8월 7일부터 진주를 탈환하기 위한 개전 이래 최초의 반격작전을 개시했는대, 마산지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감행했던 그 반격 작전 기간중 8월 1일 새벽고사리 지구에서 북괴군 6사단의 기동정찰부대를 요격하여 거둔 혁혁한 전공으로 8월 6일 부로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린 김성은부대 장병들은 야반과 수리봉 (557) 서북산(739) 등 진동리 서북방에 있는 중요한 고지를 사력을 다해 공격 점령했고, 8월 12일 에는 중암리(-함안군 군북면)로 기동하여 패퇴한 적이 집결해 있는 오봉산과 필봉을 북에서 남으로 공격하여 일부 목표를 점령하는 등 부여된 공격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 함으로써 해병대의 감투정신을 빛내었다.그런데 12일까지 계속된 미육군 킨 특수부대의 반격작전에도 불구하고 장사동에서 한국군 제3사단이 적에게 포위를 당하고, 북괴군 4사단은 낙동강 돌출부의 박진에서, 북괴군 3사단은 대구 서북방에서 낙동강을 건너오는 등 낙동강전선에 절박한 위기가 조성되었다.미8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8월 13일을 기해 방어작전으로 전환이 되고 말았는데, 그와 같은 조처는 미8군의 기동예비대로 확보하고 있던 미해병 제5연대를 영산지구에 투입하고, 배속된 한국해병대를 포함한 한국군부대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등 병력의 전용을 단행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