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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창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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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창설배경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와 순천 지구에서는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14연대내에 침투 조직되어 있던 김지회(중위),지창수(상사), 홍순석(중위) 등 3명의 주모자와 40여명의 남노당 프락치들에 의해 주도된 반란, 폭동사건이 발생하여 그 두지역에서 군, 경을 비롯한 약 2000여명의 관민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초래된 바 있었다.그런데 그 사건은 해방 후의 정치적 사회적인 혼란을 반증하는 불행한 사건이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창설을 보게 된 것이 곧 해병대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육군에서는 그 당시 광주지국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여단과 제5여단을 통합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폭동진압작전을 전개한 끝에 22일에는 순천을 탈환하고 27일에는 여수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나, 22일 육군의 진압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편성했던 해군진압부대 (임시함대)는 제반 여건과 능력의 한계성 때문에 해상으로 도주하는 소수의 반란군을 분쇄했을 뿐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손원일 참모총장을 위시한 해군수뇌부에서는 그 작전의 결과를 면밀히 분석하는 과정에서 대두된 다음과 같은 가정적인 판단 즉, 만약에 우리 해군에 육전대나 해병대와 같은 특수한 전투부대가 있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가정적인 판단과 그러한 판단에 따라 제시된 일부 지휘관 및 참모들의 건설적이고 애군적인 의견과 건의가 그러한 특수부대를 갖는 것이 삼면환해의 조국강토를 지켜 나갈 우리 해군의 필연적인 당위성으로 인식되고, 또 해군의 현실과 미래를 위해 그 필요성이 절감됨에 따라 마침내 그 창군기의 해군수뇌부에서는 결코 용이할리 만무한 시대적인 여건을 무릅쓰고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 그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끈덕지게 박차를 가한 끝에 드디어 그 어려운 일을 성사시키고야 말았다.
해병대의 창설을 뒷받침한 법령은 49년 5월 5일에 공포된 대통령령 제88호였다.
그런데,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
(제1조),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육상전투에 임하는 동시에 주둔지역의 경비임무를 수행한다]
(제2조) 라고 되어 있던 그 1,2조 중 해병대의 임무를 규정한 제2조는 6.25동란중인 52년 8월 16일에 개정 공포된 대통령령 제672호에 의거 [해병대는 해군작 전에 의한 상륙작전을 담당하며 필요에 의하여 일반 육상전투에 종사할 수 있다]로 개정이 됨으로써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전투부대임을 명문화시켰다.
해병대가 정식으로 창설되기 이전부터 해군에서는 해병대가 반드시 창설된다는 신념하에 상륙전의 경험이 있는 안창관 소위, 김낙천 소위 등 30명으로 편성된 작업선발대를 앞으로 해병대의 기지가 될 진해덕산비행장에 파견(1949.2.21)한 바 있다. 파견대장 안창관 소위는 이들 선발대를 중심으로 연병장을 닦고 병사로 사용할 부서진 격납고를 수리하는 작업에 열중하였는데, 연병장을 닦는 일은 비교적 순조로왔으나 격납고를 수리하는 일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동년 3월 28일 해군에서 전입된 장교 및 하사관과 신병 등 총 380명으로서 보잘것없는 여건속에서 열과 성의로써 새 역사의 창조와 조국수호의 강병육성을 위해 온갖 애로와 고난을 극복하면서 문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드디어 1949년 4월 15일 대망의 해병대가 창설 되었다. 이날 신현준 사령관은 해병은 단결하여 온갖 고난을 이겨 유사시에 대비할 최강부대를 이루도록 교육훈련에 정진하자는 훈시로써 장병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자유를 수호 하는 역사를 창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한국해병대는 국군중에서 최강부대로 육성하겠다는 신념으로 해병대의 질적,양적 확충을 도모하였다. 이때의 우리 해병대는 사령부요원 15명, 근무중대 70명, 정보대 10명, 2개소총중대 270명 등 380명 으로 편성되었고, 사병으로서는 해군신병 13기중에서 인수한 해병대 신병 1기생(303명)이 그 근간이었다. 그 후(8.1) 해군신병 14기중에서 인수한 해병대 신병 2기생(440명)이 새로운 해병대 가족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훈련방식은 일본의 해군과 육전대식 그리고 미군의 방식이 혼합된 상태였고, 장비는 모두 일본 99식 소총이었으며, M1소총은 교육용으로 1정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천자봉까지 완전무장하여 휴식없이 구보로 정신력과 인내력을 배양하였고, 단체훈련과 경기 등으로 심신을 연마해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우수한 해병대장교의 육성을 위해 사관후보생 30명을 태능의 육군사관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을 이수하게 하였는데,이들이 곧 해간1기생이다. 이렇게 해병대가 체제를 갖추게 됨으로써 동년 8월 15일에 거행된 광복4주년기념식에 우리 해병대가 참가하여 서울시민들이 우리 나라에도 해병대가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1949년 8월 1일 해병대 신병 제2기 440명을 해군에서 인수하고 장교 및 하사관 수명이 전보되어 해병대는 2개대대 규모로 확충되었다. 창설초기에 있어서 우리 해병대에게 어울리는 독특한 노래가 필요하다는 간부들의 의견이 대두되어 당시의 참모장 김성은 중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군가제정위원회에서 채택된 것이 "나가자 해병대"이다.그것은 신영철해병(예비역 소령)의 작사초고를 약간 수정하고 김형래씨(당시 경찰악대장)가 작곡하였으며, 다시 이병걸씨(해군군악대장)가 군악으로 편곡한 것이다.
진주 주둔기
여순반란사건 이래 잔여공비들이 지리산에 숨어들어 유격활동을 하고 이지역 일대에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고 있어 민심이 극도로 동요되고 있었고 더욱 진주는 마산, 진해, 부산을 연결하는 중 요도시였다. 이에 따라 1949년 8월 26일 대구에서 신현준 사령관과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준장)이 맺 은 협정에 의해 해병대 일부병력이 진주에 파견되어 공비소탕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동년 8월 29일 김성은 중령을 지휘관으로 하는 1개대대를 편성하여 진주(사범학교 기숙사) 에 본부를 두고 진주, 창녕 및 함안 일대에서 준동하는 공비를 소탕하게 되었다. 진주 주둔시 해병대의 표어는 [백성없이는 전투도 없다]라는 것으로서 일체의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우리 해병대가 진주에 주둔하여 공비를 소탕함에 있어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훈시를 내렸다.
첫째, 공비조직 이상의 세포조직을 갖출 것,
둘째, 군.경.민협동면에서 해병대가 선봉이 될 것,
셋째, 공비들이 허울좋은 선전에 빠지지 않는 굳은 신념을 가질 것 등이었다.그리고 선무공작조를 조직하여 취약지역을 순회하는 한편 나머지 시간을 맹렬한 훈련으로 충당하였다. 이같은 우리 해병대의 모습을 목격한 주민들은 해병대를 믿으며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진주를 시찰했던 정일권준장과 하우스맨 해병대고문(소령)등이 직접 확인하여 국방부장관 및 재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중장 등에 정식 보고한 바 있다. 이와같이 진주에 주둔하고 있던 시절,우리 해병대는 공비토벌과 함께 자체의 정신무장, 민심수습, 선무공작 및 전기연마 등에 힘써 앞으로의 발전에 대비해 나갔던 것이다. 해병대는 동년 12월 26일 육군 제2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기 위하여 제주도로 이동하게 되었다.
제주도 주둔기
해병대가 진주에서 공비를 소탕하다가 제주도를 이동한 것은 1949년 12월 28일이었다. 우리 해병대가 제주도에 주둔하면서 수행한 임무 첫째, 우리 해병대 자체의 정신적 및 육체적 훈련을 실시하는 것, 둘째, 4.3사건으로 인해 물심양면으로 피폐한 30만도민에게 재기의 힘을 주는 한편, 그들은 생활면에서 안정되도록 인도하는 것, 셋째, 한라산을 근거지로 삼고 준동하는 공비를 토벌하는 것이었다. 특히 도민을 계몽하여 공비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도록 힘쓰는 한편, 군의관으로 하여금 무의촌을 순회 진료하며,도민의 도로보수공사를 돕는 등 도민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에 노력하였다. 또한 제주도에서 여성이 많다는 점에 유념하여 여성을 대하는 태도면에서 극히 신중을 기하여 군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할것을 강조하는 사령관의 경고를 준수함으로써 도민의 해병대에 대한 신뢰심을 높였다. 제주도 주둔 해병대는 제주읍과 모슬포에 배치하고 모슬포부대는 제주도일대의 경비에 임하였으며 모슬포부대의 제1대대는 북제주군 일대를 담당하고 제2대대는 남제주군 일대를 담당하였다. 해병대의 제주 주둔시 가장 큰 성과는 주둔 반년동안에 실시한 정신훈련이 지금까지 해병대의 정신훈련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해병대의 수색대원들은 특수훈련을 통하여 한라산의 험산 심곡에서의 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육군 제9연대와 제2연대, 경찰, 서북청년단등이 토벌하지 못한 공비들을 소탕하는데 성공하였다. 제주도주둔시 더욱큰 과제는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6.25를 맞게되어 조국의 위기를 해병대의 피와 땀으로 구출해야한다는 사명감이었다. 해병대는 제주도 해안선의 철저한 경비와 도내 각 기관내의 유기적인 협조로 전투력을 통합하는 한편 도내치안을 유지하고 해상감시 및 경계를 철저히 하며, 제주도로 상륙하는 적을 봉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국내정세에 대처하기 위해서 해병대는 적의 남침을 저지할 임무를 띄고 중부전선에 참가하기 위하여 우선 3개 중대가 1950년 7월 15일 제주항을 떠나 군산 으로 이동했다. 한편 제주도민들은 해병대를 신뢰하여 제주도의 많은 청년들이 해병대에 입대함으로써 신병 3000여명 (3,4기생)을 훈련시켜 1개 연대와 독립 5대대로 편성하여이들을 중심으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을 위시한 역전의 용맹을 떨치는 대소작전을 통하여 해병대로서 중추적 역할을 다하였다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와 순천 지구에서는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14연대내에 침투 조직되어 있던 김지회(중위),지창수(상사), 홍순석(중위) 등 3명의 주모자와 40여명의 남노당 프락치들에 의해 주도된 반란, 폭동사건이 발생하여 그 두지역에서 군, 경을 비롯한 약 2000여명의 관민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초래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은 해방 후의 정치적 사회적인 혼란을 반증하는 불행한 사건이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창설을 보게 된 것이 곧 해병대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육군에서는 그 당시 광주지국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여단과 제5여단을 통합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폭동진압작전을 전개한 끝에 22일에는 순천을 탈환하고 27일에는 여수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나, 22일 육군의 진압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편성했던 해군진압부대 (임시함대)는 제반 여건과 능력의 한계성 때문에 해상으로 도주하는 소수의 반란군을 분쇄했을 뿐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손원일 참모총장을 위시한 해군수뇌부에서는 그 작전의 결과를 면밀히 분석하는 과정에서 대두된 다음과 같은 가정적인 판단 즉, 만약에 우리 해군에 육전대나 해병대와 같은 특수한 전투부대가 있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가정적인 판단과 그러한 판단에 따라 제시된 일부 지휘관 및 참모들의 건설적이고 애군적인 의견과 건의가 그러한 특수부대를 갖는 것이 삼면환해의 조국강토를 지켜 나갈 우리 해군의 필연적인 당위성으로 인식되고, 또 해군의 현실과 미래를 위해 그 필요성이 절감됨에 따라 마침내 그 창군기의 해군수뇌부에서는 결코 용이할리 만무한 시대적인 여건을 무릅쓰고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 그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끈덕지게 박차를 가한 끝에 드디어 그 어려운 일을 성사시키고야 말았다. 해병대의 창설을 뒷받침한 법령은 49년 5월 5일에 공포된 대통령령 제88호였다. 그런데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 (제1조)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육상전투에 임하는 동시에 주둔지역의 경비임무를 수행한다] (제2조)라고 되어 있던 그 1,2조 중 해병대의 임무를 규정한 제2조는 6.25동란중인 52년 8월 16일에 개정 공포된 대통령령 제672호에 의거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상륙작전을 담당하며 필요에 의하여 일반 육상전투에 종사할 수 있다]로 개정이됨으로써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전투부대임을 명문화시켰다.